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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야기

마태복음 25:1-13

by 온건지서 2025.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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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다.
“너의 죽음을 항상 기억하라.” 라틴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일어날 일이라고.

하지만 고 이어령 교수는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가장 큰 실수가
“나는 안 늙을 것이다”라는 착각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남는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결국, 누구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고,
심판도 내 삶과 아주 밀접한 곳에 있다.

그렇기에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이 땅에서 가장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오늘”이 선물임을 믿고,
최선을 다해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오늘 본문은 종말에 관한 대표적인 비유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는 10명의 처녀.

그중 5명은 슬기로운 자들이었고
나머지 5명은 미련한 자들이었다.

이 둘의 차이는 단 하나였다.
등불만 준비했느냐,
아니면 등불과 기름까지 준비했느냐.

사람의 눈에는 기름까지 준비한 쪽이
오히려 더 번거롭고 괜히 걱정 많은 이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을 슬기롭다 말씀하셨다.

 

정말 두려운 건 이거다.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잔치에 참여했지만,
준비되지 못한 자들은 결국 문 밖에 남겨졌다는 것.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0절)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11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12절)

그 말은 정말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안 된다”는 단호한 거절이다.

나는 이런 장면이 너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님의 모습은
유약하고 섬기는 종이며,
기다리고 받아주는 사랑의 주님 아닌가.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주님은
단호하고, 냉정하며, 심판의 주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날, 종말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기름 하나 없었던 것뿐인데 너무 야박하신 거 아니냐”고.
등불은 준비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부라면 당연히 준비해야 할 것,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겉으로 보이기엔 똑같이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 중심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경고와도 같은 장면이다.

 

주일성수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1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사람들 앞에서 길게 기도하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마음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이 주님께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종교적 행위를 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는가?”

교회 생활은 흠 없이 해도
내 일상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사라졌다면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등불을 준비하는 것,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바로 기억하는 것이다.

 

심판이 있다는 걸,
내가 한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헤아려질 거라는 걸
기억하는 것.

그리고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
은혜를 입은 자라는 걸 기억하는 것.

그렇기에
나도 누군가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오늘을 슬기롭게,
기름을 준비한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비극은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각기 다르다는 데 있다.
정작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하지 못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생명과 사람을 놓친다.

이어령 교수는 말년에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세상을 좁게 살았다.
어릴 적부터 글 쓰고 책 읽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 생각해
다른 걸 보지 못했다.”
그게 너무 후회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슬기로운 삶일까.
무엇이 미련한 삶일까.

그저 성공이 아니라 성경으로 사는 삶.
그저 성취가 아닌,성육신, 거룩을 향한 삶.이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굳이 참을 이유가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참는다.
예수님이 나를 참아주셨기에.

 

내가 불리해지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고 책임질 수 있는 건
예수님께서 내 죄를 책임지셨기 때문이다.

 

이건 거룩을 향한 싸움이다.

여전히 이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믿는다.

 

세상에는

무명한 자 같지만 유명한 자가 있고,
가난한 자 같지만 부유한 자가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다.

때때로 목사도
그길이 버거울 때도 있다.

걸어야 한다.

예수께서 걸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예수님을 구한다.
내 마음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기 위해 기도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구하고,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두드린다.

 

오늘은 선고가 있는날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요동치 않고

주님으로 가득한 오늘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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